최근 원유값이 폭등한 뒤 연달아 물가가 상승하며 에너지가 우리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면을 맞아 <한국을 이끈 에너지 변천사! 구한말부터 현대까지>를 전해드리려 하는데요. 과연 우리나라는 어떤 에너지원과 함께 발전하고 있었을까요? 구한말 석탄 에너지부터, 현대의 다양한 대체 에너지까지!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 에너지,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시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석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609년 경북 영일군 갈탄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 31년(609년) 정월에 모지악(경북 영일군 갈탄지역으로 추정)의 땅이 타면서 연기가 났다’라는 기록이 있죠. 석탄을 사용한 기록은 윤유가 편찬한 『속평양지』에서 1730년(영조 6년)에 ‘평양부 동쪽 30리쯤의 미륵현에 흑토(黑土)가 있습니다. 흑토를 황토와 섞고 물로 혼합하여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이를 사용한다’고 전해진 것이 시초죠.
하지만 석탄이 본격적으로 산업으로 육성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러시아인에게 함경도 경성과 경원지방에 대한 석탄 채굴권을 허가하면서부터인데요.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며(아관파천) 러시아인에게 석탄 채굴권이 허가된 것입니다. 그런데 채굴 허가를 받은 러시아인들이 실제로 석탄을 생산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실제로 탄광개발이 착수된 것은 황실이 직영하고 나선 1903년 1월로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석탄 탄광인 평양광업소는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의 운영 아래에 있었고, 그때부터 석탄 산업은 급격하게 발전했습니다. 실제로, 생산량이 불과 5년 만에 3배가 성장하죠. 생산한 석탄은 국내와 청나라에 절반 정도 판매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일본 해군의 연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이후 1920년대부터 함경북도 아오지탄광 같은 대규모 탄광이, 남한에서는 문경 탄광이 개발되며 다시 한번 급격한 성장을 이룹니다. 1929년은 석탄 94만 톤을 생산해 1919년 대비 4배 이상으로 성장하죠. 하지만 급격한 석탄 에너지 성장에는 그만한 아픔이 뒤따랐는데요. 전체 광구 442개 중 95%가 일본인 소유로 조선인은 노동력만 착취당하는 비극의 시기였기 때문이죠.
그렇게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던 석탄 개발은 해방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해방 이전 석탄생산의 80%를 북한지역이 담당했지만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며 남한이 심각한 연료난에 봉착한 것이죠. 급기야 1947년 11월에는 연료 부족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됐고,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지역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이에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새 정부의 최대 과제는 연료 문제였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1950년 11월 국영기업체인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해 석탄 증산에 집중했습니다.
전쟁 이후, 한국은 경제 혼란 속에서 산업 시설 전반이 피폐해집니다. 당시 주 에너지 공급원은 장작과 숯 등의 신탄 비율이 높았죠. 1956년에는 에너지원의 73.9%가 신탄으로 이루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신탄 생산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녹지를 재생시키는 일이 시급한 상황이었는데요. 이에 정부는 나무를 연료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산림녹화 5개년을 추진하고, 동시에 석탄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석탄개발 5년 계획 및 연료종합 5개년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렇게 국내 에너지원 구성에서 신탄의 비율은 1966년, 35.3%까지 감소했고, 석탄은 1956년 18.7%에서 1966년에는 46.2%까지 증가했죠. 나무로 방을 따뜻하게 데우는 것이 일상이었던 국민들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빠르게 가정 난방용 연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빈민 실업자가 넘쳐나던 대한민국에 고용 창출 효과를 일으킴은 물론,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를 개설하고, 산림녹화 사업에 성공하며 ‘한강의 기적’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그야말로 고공행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석탄 공급이 증가해도 넘쳐나는 수요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죠. 급기야 1966년에는 연탄이 잘 팔리지 않는 시기인 여름부터 수요가 급증하더니 설상가상으로 겨울 한파가 들이닥치며 연탄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를 기점으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던 연탄 가격은 급격히 폭등하며 전 국민이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연탄 파동이 일어납니다.
경제 성장을 위한 공업화 과정으로 석유가 필요해진 상황에 연탄 파동까지 일어나자 정부는 석탄 위주에서 유류 위주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국내 석유 공급은 외국 법인인 대한석유저장회사(KOSCO)에 독점하 있었고, AID 원조자금에 의지하며 비싼 석유류 완제품만을 수입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이에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위해선 원유를 수입해 국내에서 가공하는 정유공장 설립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1964년에 울산 정유공장을 설립 및 가동을 시작하죠.
본격적으로 공급이 시작되자 1962년에 9.8%에 불과했던 석유 점유율은 1971년에는 50.6%를 차지하여 국내 에너지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덩달아 석탄 수요는 서서히 감소세로 돌아섰고, 1967년 초 200여 개에 이르던 탄광은 1969년에 50개로 감소했죠.
그렇게 석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1973년에 들이닥친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산업은 새로운 파도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OPEC의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무기화를 시도하며 일방적으로 원유 가격을 대폭 인상했고, 이 여파로 세계 경제 전체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충격은 우리나라에도 이어졌습니다. 1973년 11월 28일 밤, 화려했던 서울의 거리가 어둠을 맞이했는데요. 명동, 무교동, 충무로, 시청 앞 등 서울 시내 번화가의 네온사인의 70%가 꺼졌죠. 바로 석유 파동으로 심각한 에너지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 의존적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습니다. 1975년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24.7% 상승하였으며, 국제수지는 18.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죠. 석유난로를 쓰던 가정은 등유 값이 28% 올라 겨울철 난방비 걱정이 늘었고, 주부들은 유류값 인상이 곧 생필품값 인상을 가져올 것이라 예상하고 화장지, 비누 등을 마구 사들여 각종 생필품이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실질적인 경제 체질 개선보다는 중화학 공업정책을 강행하며 경제 규모의 확대에 집중했습니다. 이에 1979년에 발생한 2차 석유파동에는 더욱 큰 타격을 받으며 경제성장률이 6.5%로 하락하고, 물가상승률은 30%에 육박했죠. 이에 부족한 석유 공급량을 채우기 위해 석탄 채굴이 다시 한번 부상하죠.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석유의 중요성을 깨닫고,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사업이 1980년대 이루어진 ‘석유비축사업’인데요. 석유수급의 차질에 대비해 정해진 기간(국제에너지기구 기준 90일 권장)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석유를 비축해두는 것이죠. 정부는 1980년부터 2025년까지 6조 4천억 원의 비용을 들여 전국 9개 비축기지에 146만 배럴을 저장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현재 한국석유공사는 146백만 배럴 규모의 시설에 ‘19년 기준 96만 배럴의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1978년, 국내 에너지원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63.3%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1981년에는 58.1%, 1991년에는 57.7%로 소폭 감소했는데요. 석탄의 소비가 급격히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석유의 중요도가 많이 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원자력 에너지와 천연가스(LNG)’ 때문인데요.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반핵 흐름이 고조됐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기상 이변으로 석탄 사용에 대한 경각심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한국 도시지역의 대기오염 수준이 심각해짐에 따라 환경오염 물질 배출 절감을 위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시급해졌죠.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원자력 에너지와 천연가스입니다. 수력발전은 물리적으로 용량 확대가 불가하며, 석유나 천연가스는 부존량이 한정돼있고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 가격변동이 심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1970년에 원전 도입을 결정하고 1978년에는 국내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를 준공했죠. 이후 1983년, 고리 2호기와 월성 1호기까지 준공이 완료되며 본격적인 원자력 발전 시대가 열렸습니다. 또한 1988년에는 신도시 지역 4개(분당, 평촌, 중동, 일산)에 LNG를 기반으로 한 지역난방시설을 건설하고, 이를 계기로 후속 발전소들이 등장하며 LNG 역시 주요 발전 연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며 석유 파동과 같은 리스크를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한 원자력 에너지. 하지만 핵발전소의 위험성이 수면 위로 떠 오르며 ‘에너지 전환’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에너지 전환이란 화석연료와 원자력 기반의 에너지 생산을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생산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공업화가 절정에 이른 19세기~20세기에 석탄에 밀렸던 나무나 가축의 배설물 연료와 같은 재생에너지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며 재생 에너지 역시 이전과 다른 형태로 보급됩니다. 우리나라는 신에너지로 수소, 연료전지, 석탄액화가스 등 3종, 재생에너지로 태양열, 태양광, 바이오에너지, 풍력, 수력, 지열, 해양, 폐기물 등 8종을 분류 지정하여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1987년 「대체에너지개발촉진법」을 제정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뛰어듭니다.
신재생에너지의 대표 주자로는 태양광 에너지와 풍력 에너지가 있는데요. 대한민국은 2015년 기준 3.92%인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을 2035년에는 11%까지 달성하겠다를 목표로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의 비중을 크게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한국에너지공단에서 발간한 「신재생에너지보급통계」에 따르면 2012년에는 243천 toe였던 태양광 에너지 생산량은 2018년에 2,194천 toe까지, 풍력 에너지는 2012년 193천 toe에서 2019년 525천 toe까지 증가할 정도로 그 규모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죠.
우리나라는 에너지전환로드맵(‘17)과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19)을 통해 원전 비중 확대 등 에너지·탄소중립 관련 국정과제를 마련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해 새로운 에너지정책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지난 7월 5일, 대통령 주재 제30회 국무회의에서 발표한 ‘새정부 에너지정책 방향’에 따르면 ‘21년 27.4%에 달하는 원전의 비중을 30% 이상으로 확대하고,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는 ‘21년 81.8%에서 60%대로 축소시키는 목표를 갖고 있죠.
반면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산업의 성장은 아직 미비한 수준인데요. 태양광 발전은 크게 발전했으나, 풍력 발전은 아직 초기 단계의 해상풍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죠. 육상 풍력의 경우 해당 지역의 반대, 복잡한 허가 절차, 에너지 수송 및 네트워크 미비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에너지 디지털화’입니다. 에너지 디지털화는 에너지 시스템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데이터의 수집, 분석, 연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석유, 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 개발에 드론을 활용해 생산성을 확대하거나, AI를 통해 예측 정비, 유지보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해 최적의 관리가 가능하도록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전력 계통 불안정성과 수요·공급 불균형 등의 문제점을 완화시킬 것으로 기대되죠. 현재 에너지 디지털화 시장은 2024년에는 640억 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될 만큼 큰 미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2020년대 에너지 업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에너지 안보’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는 이례 없는 변화를 겪었고 에너지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코로나19로 세계 에너지 수요가 급감하며 원유 가격 역시 하락한 것이 대표적인 현상인데요. 항공 운행이 중단되고, 비대면 활동이 일상화되며 전반적인 소비가 줄어듦에 따라 전 세계는 ‘20년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70년 만에 5% 이상의 수요 감소를 겪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에너지통계연보」에 따르면, ‘20년에는 1차 에너지 소비가 전년 대비 3.6% 감소했고, 특히 석탄 부분에서 12.1%가, 석유 산업 부분에서 6.0%가 감소하는 특징을 보였죠.
이러한 현상은 세계 에너지 시장에 급격한 변화를 야기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모든 분야에서 수요와 가격이 낮아짐에 따라 코로나 이후 에너지기업의 재무상태는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또한, 시장 신호의 영향을 덜 받는 기업 중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보유한 기업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으로 보았죠.
하지만 코로나 백신 개발로 일상이 정상화가 되며 에너지 소비는 다시 예년처럼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에너지통계월보(‘22년 3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22년 잠정 최종에너지 사용량은 2억 3459만 1000toe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죠. 이렇게 다양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에너지 수요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던 우리나라는 올해에 또 다른 새로운 에너지 국면을 맞이했는데요.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공급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한 뒤 세계 에너지 안보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3월 이후 러시아산 석유, 가스, 석탄 등 주요 에너지 수출품에 대한 다양한 제재 방안을 내놓았는데요. 이에 러시아가 원자재 수출을 차단하는 결정을 하며 원가가 급등했습니다. 이 여파로 지난 6월 우리나라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4년 만에 6%를 기록했죠.
이러한 상황을 겪으며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국내 기술을 통해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는 ‘에너지 안보’에 더욱 경각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더불어 우리나라는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를 목표로 대대적인 에너지 전환을 맞이하고 있죠. ‘탄소 중립’과 ‘에너지 안보’라는 두 가지 중대한 목표 앞에 서 있는 대한민국. 앞으로는 친환경적이면서도 지속 가능하고, 무엇보다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할 수 있는 에너지원을 찾는 것이 미래 에너지 산업의 핵심이 될 듯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에너지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609년 처음으로 석탄이 발견된 기록부터, 한국의 21세기를 이끌 에너지 디지털화까지! 에너지의 역사를 살펴보니 지금까지 선조들이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한데요. 과연 앞으로 우리나라, 그리고 전 세계의 에너지 산업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